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폴란드 침공]] 당시 바흐의 휘하 부대들은 [[폴란드군]] 포로와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다만 그는 직접 폴란드 침공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폴란드 침공이 끝난 후 SS 최고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그에게 슐레지엔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여 [[1940년]] 8월까지 슐레지엔 지방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2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1939년 연말에는 힘러에게 폴란드 오시비엥침 지방에 포로를 수용할 대규모 수용소를 설립해 줄 것을 건의하였고, 힘러는 처음에는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곧 허가해 주었으며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의 설립에는 어느 한 사람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나치당의 여러 인물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일단 알려져 있는 정보로는 에리히 폰 뎀 바흐가 아우슈비츠의 설립을 청했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아우슈비츠의 건설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로 [[독소전쟁]]이 발발하던 때 바흐는 [[페도어 폰 보크]] [[원수(계급)|원수]]의 중부집단군 휘하로 참가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진행 중이던 7월에는 SS 대원 1만 1천 명, 일반 경찰 6천 명을 지휘하였고 이때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유대인 3만 5천 명을 처형하도록 [[아인자츠그루펜]]에게 명령했다. 9월에는 [[파울 블로벨]] [[대령]]을 시켜 [[바비야르 학살]]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벨라루스]]의 [[민스크]]와 모길료프에서도 똑같은 학살을 저질렀다. 바흐첼레프스키는 벨라루스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에 종사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독일군 제707보병사단은 병사 2명이 전사하자 그 앙갚음으로 파르티잔 1만 431명을 잡아 죽이기도 했다(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203).], 힘러가 직접 바흐첼레프스키를 찾아 유대인 처형을 참관하기도 하는 등 힘러는 유대인 처리 작업에서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발트 3국]]에서 유대인을 몰살한 후 힘러에게 "이제 [[에스토니아]]에 남아 있는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보고할 정도였다. 1941년 말에 바흐첼레프스키의 휘하에는 5만여 명이 있었다.(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197) [[194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프라하]]에서 암살된 후에는 하이드리히의 직위였던 보헤미아-모라바 총독 직책이 바흐첼레프스키에게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반대하고 대신 [[쿠르트 달루게]]에게 돌아갔다. 쿠르트 달루게는 에리히 폰 뎀 바흐의 최종 계급보다 한 단계 높은 최상급 집단지도자(SS-Oberstgruppenführer)까지 진급하였으며, 보헤미아-모라바 총독으로 임명된 후에는 하이드리히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프라하 근처 마을인 리디체(Lidice)에서 학살을 지시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10월 24일 프라하의 판크라츠 감옥(Pankrác Prison)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Weiss-047-37%2C_Russland%2C_Minsk%2C_Ordnungspolizei%2C_Bach-Zelewski.jpg|width=500]] ▲ 1943년 민스크에서 무장친위대 부대에게 연설하는 장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Weiss-047-31,_Russland,_Minsk,_Ordnungspolizei,_Bach-Zelewski.jpg|width=500]] ▲ 1943년 민스크에서 [[질서경찰]]들을 사열하는 모습.[* 첼레프스키의 왼쪽은 [[무장친위대]] 대장 [[커르트 폰 고트베르크]]이다.] [[1943년]]에는 아예 파르티잔 진압 부대(Bandenkampfverbände)의 총 책임자가 되어 [[나치 독일]]이 점령한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일어나는 파르티잔 운동을 진압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정작 죽이고자 했던 파르티잔 토벌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민간인 피해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수치상으로 전과를 올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Bundesarchiv_Bild_101III-Alber-096-34,_Arthur_Nebe.jpg|width=25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J08517%2C_Otto_Ohlendorf.jpg|width=250]]|| ||<:>▲ [[아르투어 네베]]||<:>▲ [[오토 올렌도르프]]|| 바흐-첼레프스키 아래에서 학살을 전담한 주요 인물로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지휘관 [[아르투어 네베]](Arthur Nebe), 아인자츠그루펜 D의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 등이 있다. 두 인물 모두 집단지도자까지 진급했으며 아르투어 네베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1945년 3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졌고, 오토 올렌도르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5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